[스크랩] 국경의 섬 대마도 사진기행(1탄)
1일차-2006년 10월 21일(토)
<이동경로/청색은 갈 때, 적색은 올 때>
<새벽의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지난 밤 11시 태안을 출발한 버스가 밤새 달려 부산 국제여객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21일 새벽 5시 50분입니다! 온통 주위는 어둠에 쌓여 있고 옅은 조명만이 간간히 비추어 줄 뿐입니다.
<부산은행창구 앞 환율표>
아직도 여객선의 출발시각은 멀었기에 일부 일행은 자갈치시장 관광에 나섰고, 나는 터미널 안에 들어가 벤치에 잠시 누워 봅니다. 버스의 좁은 좌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합니다.
한 동안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나 터미널 안을 둘러봅니다. 부산은행 창구 앞의 금일의 환율을 보면서 엔화에 대한 우리나라의 원화가치가 많이 올라가 있음에 조금은 놀랍니다. 예전에는 10배도 넘었었는데......
<각 노선별 매표소>
대아고속해운사무실을 비롯한 모든 창구는 문이 굳게 잠겨 있고 주위는 한적하기만 합니다. 이곳 부산에서 츠시마(対馬)는 물론 후쿠오카(福岡), 시모노세키(下関), 그리고 더 멀리 오사카(大阪)까지 연결되는 배편의 매표소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국경의 도시 부산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일본여행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림에서의 아침식사>
터미널 내 화장실에서 세면을 마친 일행은 8시가 되어 2층에 마련된 식당 세림(稅林)에서 식사를 하게 됩니다. 라면을 드시는 분에 국밥을 드시는 분!
식사를 마치고 나와 터미널 2층 식당 앞에서 보는 부산날씨는 산뜻하게 맑아 있습니다.
<식당 앞에서 본 부산>
8시 40분! 1층으로 내려가 출입국 신고 준비를 하고, 다시 식당 옆 2층으로 다시 자리를 옮깁니다. 9시 30분 드디어 문이 열리고 검색대를 지나 출국심사대를 통과합니다. 통과하자마자 작은 규모의 면세점이 있고, 우측 옆으로 GATE가 두개가 보입니다.
<부두에서 본 부산>
정각 10시! 출구는 열리고 승선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탑승할 씨플라워-2호>
배에 탑승을 하면서 우리가 타고 떠날 SEA FLOWER Ⅱ호의 모습과 부산의 모습을 담아봅니다. 아주 가까이에 용두산 공원도 보입니다. 나의 좌석번호인 D-070을 찾아봅니다. 다행히 사진 찍기에 좋은 창 측입니다.
<멀어지는 부산항>
드디어 배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부산을 뒤로한 채 국경을 향해 달립니다. 부산항이 멀어질수록 배의 흔들림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일기예보에서는 세찬 바람과 함께 약간의 비도 내린다고 했으나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세찬 파도는 300여명을 태울 수 있는 이렇게 큰 배도 마구 흔들어 놓습니다.
<대한해협의 검은 빛 바닷물>
일행 중 두 명은 아예 초죽음 상태에 빠집니다. 시간상으론 벌써 국경을 넘을 시각이 되었습니다만...... 유리창 밖은 물방울이 튀어 사진 찍기 조차 여의치 않습니다.
문득 사의찬미란 노래를 부른 가수 윤심덕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랑하는 연인과 투신자살한 현해탄이 이 곳이 아닌가 하고 문득 카메라를 창밖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다색이 더욱 검게 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불길한 예감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하지만 전파상태가 좋치 않아 제대로 통화가 안 됩니다. 국제로밍을 해가지고 간 또 다른 전화기를 켜 봅니다. 하지만 역시 전파가 미약합니다
<대마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희미하게 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윤곽은 짙어만 갑니다. 이제 일행은 배안에서 구입한 아사히(朝日)맥주로 입을 축여가며, 한국에서 사가지고 간 도시락을 꺼내서 먹기 시작합니다.
<대마도 동쪽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제 배는 쓰시마(対馬) 섬의 동쪽 연안을 따라 남쪽 끝으로 향합니다. 해안 풍경을 찍으려 하나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탓에 도저히 초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이즈하라항에 도착>
바람과 물결 탓인지 도착 예정시각인 13:10 분이 지나도 배는 계속 남쪽을 달리기만 합니다. 여객선이 대마도(対馬)의 남단 이즈하라(厳原)에 도착한 시간은 30분이나 지연된 13시 40분으로 약 3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즈하라항의 한가로운 모습>
<이즈하라 항구 주변 모습>
나는 한참을 기다려 입국수속을 마치고 세관을 통과하여 나옵니다. 그래도 제일 먼저 나와 주변풍경을 카메라에 담아가며 일행을 체크합니다. 36명이 모두 통과하여 나오는데 약 1시간 이상이나 소비했습니다.
<항구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길 / 거리가 가까워 걸어다닙니다.>
<수선사 일주문 앞에서>
드디어 항구를 출발하여 첫 번째 관광코스인 슈젠지(修善寺)로 향합니다.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빠져 오르자 골목길 좌측으로 작은 절이 보입니다.
<슈젠지 맞은편 담벽에 모셔진 석불>
<면암 최익현선생 순국비>
층계를 올라 일주문 우측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고 쓰여 진 비가 있고, 후면에는 선생에 관한 내력도 요약하여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면암 선생의 순국비 옆에는 일본어와 함께 한자가 섞였지만 그래도 우리말로 새겨진 석제 해설비도 있습니다.
<최익현선생 순국에 관한 해설비>
구한말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최익현선생이 76세의 고령임에도 전라도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관헌에 잡혀 대마도로 압송되었고, "왜놈이 주는 밥은 먹지도 않겠다"며 아사하셨다고 합니다. 이에 대마도 유지들이 유체를 이절로 모셔와 충절을 기리며 제사를 올렸고, 4일간 머문 후 한국으로 이송했다고 합니다.
<김학진선생이 썼다는 수선사 현판>
그리고 이절의 창건에는 백제승인 법묘니(法妙尼)와 관계가 있다고 하며, 신라의 금동불이 모셔져 있는 등 한국과의 인연이 깊다고 합니다. 또한 이 사찰의 현판은 조선시대의 명필인 김학진(金鶴鎭)선생이 썼다고 하는데, 선명하게 붉은 인영이 새겨져 있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주문 안쪽 옆에 모셔진 작은 석제 불상들>
<면암선생 순국비 옆에 있는 납골당>
<뒷 쪽의 묘소>
<수선사 본전(本殿)>
<경내 한 켠엔 상사화가>
경내의 한쪽에는 노란 상사화(相思花) 한 송이가 활짝 피어 있습니다. 맞지요? 잎이 피면 꽃이 없고 꽃이 피면 잎이 져버려 서로 마음은 있으되 만날 수 없는...... 그래서 상사화라고 한다지요? 아마 잎도 없이 피어난 상사화가 면암선생의 충절 같아 이렇게 카메라에 담아 봅니다.
<꽁초하나 없는 깨끗한 골목길>
일행은 슈젠지(修善寺)를 뒤로 하고 다시 골목길을 나와 호텔로 향합니다. 나오는 길목 거리는 담배꽁초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이즈하라정의 꽃과 나무도안>
그리고 거리 양 옆엔 이곳 이즈하라정(厳原町)의 꽃인 등나무와 이 정(町)의 나무인 오동나무 도안이 보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화투장에서 보던 그런 도안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화투장의 4월과 11월이 이곳의 상징이군요.
<일행이 머문 쓰시마호텔>
<호텔 앞을 흐르는 냇물 / 밀물 때는 깨끗한 물이 가득합니다!>
이제 이곳에서 가장 크다는 츠시마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방은 비좁고 엉망이지만, 호텔 앞을 흐르는 냇물만은 깨끗합니다. 잠시 방을 배정받고 짐은 둔 채 모두 호텔 앞에 집결 했습니다. 이 호텔에 36명 전원을 수용할 수 없어, 인근에 위치한 카키타니(柿谷)호텔로 일부일행은 가야 하니까요.
<골목길의 이케진자>
골목길을 따라 카키타니(柿谷)호텔로 가는 길에 작은 신사(神社)를 만났습니다. 신사명을 보니 이케진자(池神社)! 아마 연못신을 모시나 봅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인구는 1억 2천이라지만 신앙을 갖고 있는 인구는 2억이라니...... 하여튼 다양한 신의 나라입니다.
<은행이름이 재미있습니다.>
골목길을 조금 더 진행하니 쥬하치깅코우(十八銀行)라는 은행이 보입니다. 우리말로 읽으려니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건너편으론 츠시마시 교류센터 건물도 보입니다.
<횡단보도 통행 안내문>
교류센터로 건너는 횡단보도에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군요! 내용을 보니 “멈춰라! 오른쪽을 보고, 왼쪽을 보고......”라고 쓰여 져 있네요! 이곳에서는 왼쪽을 먼저 보면 안 됩니다. 차량이 좌측통행이라 우리와는 반대니까요!
일행이 그림을 보느라 횡단보도 가까이 다가서자 통행하는 차량들이 모두 정지선에 서버립니다. 우리가 건널 때 까지 기다리려던 참이지요. 건너려 한 것이 아닌데 공연히 무안해 집니다.
이곳은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도 서로 양보하는 습관이 배어 있으며, 철저하게 보행자 우선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츠시마시청>
이제 카키타니(柿谷)호텔로 간 일행을 만나 대마시청 앞에 위치한 고려문으로 향합니다.
<고려문>
<고려문 앞의 고려문비>
시청 정문 앞 언덕길에 세워진 이 고려문은 원래 1678년 대마도 도주가 머물던 사지키바라(桟原)성의 제3문으로 세워졌던 것으로, 조선과 선린외교 관계를 위한 영빈문으로 사용했었다고 합니다.
<고려문에 대한 안내판>
그러나 1987년 태풍의 피해를 받아 무너져 버렸고, 대마 역사민속자료관 앞인 이곳에 이전하여 복원한 것이랍니다. 고려문이란 이름도 에도(江戸)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에 붙은 명칭이랍니다.
<아메노모리호슈의 성신교린비>
고려문을 통과라여 안쪽 으로 들어서면 우측에는 한일 친선교류에 공이 큰 일본유학자인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가 "誠信之交隣"이라고 쓴 비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메노모리호슈에 대한 설명비>
아메노모리호슈는 일본의 왕호문제로 대립했던 사람이기도 하며, 22살에 대마도에 부임하여 60여년간 조선과의 외교에 힘썼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조선어와 중국어에 정진하기도 했던 사람이며, 최초의 한국어 교재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답니다.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이었던 조선의 신유한(申維翰)도 그의 저서인 해유록(海遊錄)에서 위대한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誠信之交隣" 옆의 검은 석재비에 적혀 있습니다.
<조선통신사비>
<기념으로 인물도 담아봅니다>
대마도는 임진왜란 후 국교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그 결과 도쿠가와막부(徳川幕府) 260년간(1697~1811)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초창기의 통신사는 막부장군의 장군직 계승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는 등, 외교적 활동을 넓혀갔지요. 통신사 일행은 대개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당시 통신사 행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냐 하면, 한번 사절단이 왔다 가기 위하여, 대마도 도주는 그 앞 뒤 3년간을 오로지 이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조선통신사비'는 조선통신사 제도를 통한 조·일양국의 우호관계를 21세기 한·일관계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로 세워진 비라고 합니다.
<타마마루호 조난자 위령비>
조선통신사비 옆에는 “타마마루호 조난자 위령탑(珠丸遭難者慰靈塔)”이 세워져 있습니다.
<타마마루호 폭침에 관한 안내판>
그 옆의 안내판을 보니 부산-대마도-큐슈를 연결하는 배였던 타마마루호(珠丸)는 1945년 10월 10일 히타카츠항(比田勝)을 출발하여 이즈하라(厳原)로 들어 왔답니다. 연합군으로부터 츠시마(対馬) 해협의 항해금지조치가 해제됨으로서 이즈하라항(厳原)을 출항하여 큐슈(九州)로 가는 도중에 일본군이 부설해 놓은 기뢰가 폭발하여 순식간에 침몰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탑승자는 공식으로는 730명이지만 패전 후 만주나 한국으로부터 돌아가려는 일본군이나 인본인 등,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려는 마음에서 표도 없이 탑승한 사람이 많아, 지금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추가로 상당한 수의 피해가 있었다고 적혀 있군요. 이웃나라에 몹쓸 짓을 한 업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깐이나마 해봅니다.
<나가사기현립 츠시마역사민속자료관>
고려문 왼쪽에는 "朝鮮國通信使之碑"가 세워져 있고 바로 위쪽으로 나가사키(長崎)현립 역사자료관이 있습니다. 그사이에 타마마루호 조난자위령비가 있구요.
일행은 바로 위쪽에 위치한 나가사키(長崎)현립 역사 민속자료관으로 들어갑니다. 입장료는 무료지만, 우리의 선사박물관보다도 훨씬 규모가 작은 자료관입니다. 우리와 관련된 귀중한 유물은 복사 품이지만 몇 명의 관리인이 감시하고 있어 사진조차 찍을 수 없게 하는 것을 보니 관리만큼은 철두철미 합니다.
<츠시마 시민체육관>
자료관을 나와 유치원 옆을 지나고 시민체육관 앞을 돌아 잔디밭 길 옆에 이르렀습니다.
<조선통신사 접우지 비>
도로가에는 “조선통신사 막부 접우의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급히 통과하는 바람에 사진 한 장 만 간신히 남겼습니다. 아마 당시 에도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최초로 이곳에서 영접했던 모양입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30m거리에 ‘이왕가 종백작가 결혼봉축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高宗)의 딸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소우타케시(宗武志)와 결혼을 하여, 동년 11월 대마도를 방문합니다.
이 때, 대마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이 비를 건립하게 됩니다. 청수산성에도 대마도 사람들이 결혼을 축하하여 세운 기념비와 기념으로 심은 철쭉이 지금도 잘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 들의 결혼생활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딸 정혜를 낳아 신뢰와 애정이 깊어 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국간의 갈등이 심해져 1955년 결국 이혼에 이르렀고, 남편인 소타케시(宗武志)는 1985년에, 그리고 덕혜옹주는 1961년에 귀국 후 198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비문 옆 안내 비에는 적혀 있습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안내문>
소우가(宗家)는 대대로 대마도를 통치한 집안으로 소우타케시(宗武志)는 그 후손입니다. 대마도를 상속받았지만 명치유신으로 폐번치현(번이 없어지고 현으로 바뀜)이 되자 황실에서 도주의 작위를 폐하고 백작의 작위를 하사했다고합니다.
소우타케시(宗武志)의 후원자는 다이쇼천황의 부인인 사다코 황후로 소우타케시(宗武志)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지참금이 상당했던 조선왕가의 딸 덕혜옹주를 맺어주어 그 재정난을 덜어주려 했다고 합니다. 중신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다분히 정략적인 결혼이었습니다.
결혼 2년 뒤 딸을 낳았지만, 출산 후 덕혜옹주는 정신병이 재발하게 되고, 어머니인 양귀인의 죽음 이후 그 병은 더욱 심해졌다고 합니다.
소우타케시(宗武志)는 이를 꺼려해서 덕혜옹주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할 생각을 못하고 집안에 가둬두었고, 옹주가 자꾸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집 밖을 나가려고 하자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고도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옹주의 정신병 재발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는 아버지를 더 사랑했고,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무슨 연유에선지 끝내는 딸 정혜마져도 젊은 나이에 변사체로 발견되고 맙니다.
그에 따라 덕혜옹주의 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소우타케시(宗武志)는 그제야 그녀를 병원에 입원 시킵니다. 그러다 1951년 사다코 황후가 사망하자 끝내는 이혼하고 맙니다.
<왠 멋진 건물이 보입니다>
비운의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를 나선 일행은 카네이시죠(金石城)를 거쳐서 다시 츠시마(対馬)시청으로 향합니다.
<물이 주는 6가지 교훈>
그 건물의 벽을 따라 내려가면 이런 물이 주는 6가지 교훈이 적혀 있습니다. 그 밑에는 "세계는 한집, 인류는 형제!"라고 적혀 있군요! 잠깐 해석을 해볼까요?
1. 모든 생물에게 생명력을 주는 것은 물이요!
2. 항상 자기의 진로를 찾아 가는 것도 물이요!
3. 어떠한 장애도 극복하는 용맹심과 어떠한 모양의 그릇에도 적응 하는 화합성을 겸비한 것도 물이요!
4. 자신은 깨끗하여 남의 더러움을 씻어주고, 청탁(淸濁)을 함께 수용할 수 있는 도량을 갖춘 것도 물이요!
5. 동력이 되고, 빛이 되고, 생산과 생활에 무한한 봉사를 하고도,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도 물이요!
6. 큰 바다를 채우고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눈으로 변하고, 안개가 되어도 그 성질을 잃지 않는 것도 물이요.
물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평화와 건강과 장수의 묘약입니다.
읽어 보니 그럴듯합니다.
<카네이시죠의 야구라>
카네이시죠(金石城)는 대마도가 제일 번성하고 대규모의 사업이 실행한 시기인 1669년에 소오요시자네(宗義眞)가 건설한 성이라고 합니다.
<카네이시죠 안내판>
당시 일본에서는 천수각(天守閣)이 있는 호화롭고 장대한 성이 유행했지만, 대마도의 성에는 천수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성터에는 대마도의 돌담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돌담과 성벽이 잘 남아 있고, 한 구석에는 훌륭한 정원터도 남아 있답니다. 성 입구인 이 야구라(櫓門)는 1990년에 복원된 건물이라네요.
<서산사 가는 길 / 뒤에 대마시청이.....>
일행은 성을 나와 츠시마시청 앞을 통과하여 학익산 서산사로 향합니다. 이 곳 이즈하라의 모든 관광은 도보로 합니다. 버스가 있어도 한 곳에 주차를 하고 도보로 해야 합니다. 거리도 가깝지만 골목 길로 큰 차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무리니까요.
<서산사 전경>
서산사(西山寺)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들렀을 때 유숙하던 장소로 이즈하라 항구의 맞은편에 있습니다. 절이지만 조선통신사가 머무르던 숙소였던 때문인지 지금도 유스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 특이한 곳이기도 합니다.
<김성일선생 시비>
서산사(西山寺) 경내에 들어서니 마당 한쪽에 학봉김성일(1538-1593) 선생의 시비가 일행을 맞이합니다.
비석 앞면에는 “朝鮮通信使 鶴峯金誠一先生詩婢”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한시와 비문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져 있습니다.
一堂簪蓋兩邦臣 한 집에 의관 갖춘 두 나라 신하
區域雖殊義則均 지역은 달라도 의리와 법식은 비슷하네.
尊俎雍容歡意足 받들어 대접함에 긴장은 누그러져 환영의 뜻에 만족하니
傍人莫問主兼賓 옆 사람이여 주인이 누구고 손님이 뉜지 묻지를 마오.
“학봉 김성일 선생은 유향(儒鄕)인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덕행과 훈업(勳業)이 청사에 빛나는 도학자(道學者)였다. 대과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선생은 1590년 조선국통신사로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를 위하여 국가 외교와 문화 사절로 일본을 향한 사행(使行)길에 올랐다.
대마도에 들려 선위사(宣慰使) 현소승(玄蘇僧)의 영접을 받고 객관인 서산사에 체류하는 동안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 중 서산사와 사연이 깊은 시 한 수를 골라 이 돌에 새겨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서산사 경내 모습>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경내에 있는 시비는 의성 김씨 문중에서 최근에 만든 것이고, 원래의 시비는 산사 뒷산 기슭에 현소스님의 부도와 함께 서 있다고 하니 확인을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골목길의 작은 불당>
이제 일행은 서산사를 나와 골목길을 따라 호텔로 향합니다. 호텔로 향하는 도중, 골목 한가운데 다리 옆에 마련된 작은 불당을 만납니다. 이런 불당을 츠지도우(辻堂)라고 책에서 읽은 적은 있습니다만 이렇게 길거리서 만난 것은 처음입니다.
<마켓에 잡채와 부대찌개가 상품으로>
저녁식사 예약시간까지 아직은 여유가 있어 마트에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우리마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잡채와 부대찌개가 이렇게 상품화되어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발음도 우리발음 그대로 일본어로 표기했군요!
<만송각에 마련된 석식>
이제 예약시간이 되어 예약 장소인 만송각(万松閣)으로 들어갑니다.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나와 무릎을 꿇고 친절하게 슬리퍼를 내주며 반갑게 맞이합니다.
이미 미리 들어온 일행들은 식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제공된 식사>
개인당 지급된 식사입니다. 사시미(刺身)정식인데, 몇 점 안되는 회를 보면 우리의 식습관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소장님이 이 지역 특산의 일본 소주를 쏘셨지요? 1병에 4잔밖에 나오자 않는 소주가 무려 450엔! 유소장님 따끈한 소주 잘 마셨습니다!
<만송각 앞에서>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에서 기념촬영을 합니다.
그리고는 많은 인원과 함께 갈 곳도 마땅치 않고, 모두 각각의 호텔로 향합니다.
<침대 위에 차려진 국산 소주와 일본 안주의 환상의 만남>
그러나 이국에서 맞는 밤을 그냥 보낼 수 있나요! 일행은 가지고 온 소주, 그리고 인근 마켓에서 구입한 맥주와 안주를 꺼내놓고 마시기 시작합니다. 방이 좁아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넓기만 합니다.
대마호텔에서의 음주를 끝내고 인근 ‘카키타니(柿谷)’호텔로 순회점검을 나갑니다. 호텔명이‘감나무 골’인 것을 보니 아마 이곳도 감나무가 많았던 곳인가 봅니다.
<어항에서 날라 온 싱싱한 횟감>
이곳에서도 타카하마(高浜)어항에서 갓 잡아온 도미와 방어로 이미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물건값이 비싸다던 일본 땅에서, 이렇게 싼 가격에 이렇게 푸짐한 안주를 대할 수 있다니, 아마도 풍부한 어족이 있는 바다를 끼고 있는 섬나라이기 때문 일 테죠!
<맥주와 회의 만남>
일행은 이 집 주인의 배려로 호텔 카운터 앞 로비에서 또 한 차례 두터운 정을 나눕니다.
<대마도에 대한 감상을 주고 받으며>
한국의 청양에서 태어났다는 이집 주인은 알고 보니 강원도 철원의 어느 면의 청양리라는 곳이었습니다. 고추로 유명한 청양이라고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잘 알아 듣도록 설명을 해 주었지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장시간 호텔에서 시끄럽게 하는 것은 실수가 될까하여 모두 해산을 합니다. 하지만 처음 일본에 왔다는 몇몇 일행은 호프집이라도 들러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해선요리집 주인과>
할 수 없이 저녁식사를 하기 전, 출입문 양 옆에 소금을 뿌리며 영업 준비를 하던 아주머니가 생각나 그 집으로 안내합니다. 해선요리집인 이 집 여사장님은 서로 맥주도 주고 받으며 재미있게 대화에도 응해 줍니다. 생긴 것 만큼이나 후덕한 듯 합니다.
이제다시 호텔에 들렀으나 문은 잠겨있고, 하는 수 없이 카키타니(柿谷)’호텔의 작은 방에서 새우잠을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