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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에서 방우회 모임을.......

두레박사 2010. 5. 12. 11:45

 영주에서 방우회 모임을 ........

2010년 5월 7일 경북 영주 선비촌 만죽제에서

부부(가용현,이종숭,강원배,김일수)와 씽글(윤영길,하광호,황치용)이 만나 밤과 낮을 즐겼다.

세분의 사모님께서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도 있었지만  김일수님의 많은 배려와 준비 덕분에 매우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래도 12년만에 회원 모두가 같은 시각에 참석한 모임 이기도 하였다

5월 7일 저녁을  순흥전통(묵)음식점에서 묵과 동동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선비촌으로 향했다.  

 영주시는 경상북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남북이 길고 동서로는 협소하며,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주봉인 비로봉(1,439m), 국망봉(1,421m), 연화봉(1,394m)과 죽령을 경계로하여 도솔봉(1,315m)으로 이어진 소백산 산록 고원부지에 형성되어있으며 동쪽으로는 봉화군, 서쪽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남쪽으로는 안동시와 예천군,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소·태백권 교통의 중심도시이다.(영주시청 홈피에서 인용)

 선비촌은 우리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효의 현장에 16,418백만원의 사업비를 투자하여 2004년 재현하게 되었다 한다.

 1박2일 동안 생활한 선비촌은 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오감체험형 전시와 참여형 이벤트, 전통문화 체험의 기회가 수시로 제공되는 선비촌의 각종 기획프로그램에서 옛 선비들의 당시 생활상을 통해 잊혀져 가는 수준높은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다고 하니 잠시 체험 해 보고자 한다.

 만죽제에서 달콤한 하루를 보내고 아침식사를 위해 선비촌 입구에 위치한 선비촌 묵집으로 이동중이다. 어제 저녁도 묵을 먹었는데 내심 걱정 했지만 기우에 불과 했다. 산채 정식이라고나 할까? 정말 맛있는 아침이었다.

 이제 부터 본격적인 선비촌을 둘러 보는시간이다.

 오늘은 사모님께서 선비를 따르는 동자가 되셨네

 썬그라스 낀 선비님도 있으셨군

 아주 정말 잘 어울리는 일행이지요. 이를 천생 연분이라고 한다지요

 어인처자가 외롭게 매화 타령하고 있을꼬......... 예전에는 그리도 탐났다며 매화 타령이군요

  인기 드라마 추노의 한장면 이군요. 근데 어쩐지 양 싸이드가 어색하군요

 천진 난만한 18살 처녀님들이 물장구 치고 있는 모습이군요

 

 우리가 머무렀던 만죽제 옆으로 지나는군요.  저런집에서 어제 잠을잤지요

 골목길이 정감스럽고 예뻐서 한장 담아 봅니다

 오늘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체로 한장. 

 강원배 님께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배경이 조금 다른가요.

 

 물레방아가 정겹네요

 

 연습은 참 되었답니다.

 울회장님 오기가 발동하시네요. 연습때 잘 되었거든요.

 요기서 ......... 울 회장님 2만냥을 잃었지요.

 이제 소수 서원으로 이동하렵니다.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사액서원이라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부석사 올라가는 길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입니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국보 제46호), 고려각판(高麗刻板)(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도유형문화재 제127호), 삼층석탑(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은 신라 화엄종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安養』은 곧 『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3년(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遺物館展示館)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을 배경으로 아름 다운 미녀 4총사가 포즈를 취합니다.

 

 

 신라유물인 석등(石燈)(국보 제17호),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의 조화

 약선당에서 약밥으로 맛있게 점심을 나누고 고향으로 향했다. 1박2일동안 함께하여준 방우회원님께 감사드리오며 특히 일정을 꼼꼼하게 준비하여 주신 김일수 내외분께 회원 모두를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진의  원본을 보시려면 마우스를 대보세요.....